“왜들 그렇게 강릉을 가는걸까?”
강릉 중앙시장 평일 저녁의 인파. 시장 인심 가득.
서울을 떠나 양양으로 귀촌한 지 한 달. 조용해서 너무 좋았다. 그런데 가끔, 정말 가끔 시끌벅적한 도시가 그리웠다. 양양은 좋은데, 영화관도 없고 옷도 없고, 무엇보다 사람 냄새 가 너무 적었다. 그러다 어느 평일 아침, 우리는 이상한 결심을 했다.
“집 두고 강릉으로 가출하자.”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 마음만 먹으면 당일치기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우리는 호텔까지 잡았다. 옆에서 보면 좀 이상한 결정이다. 그래도 우리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강릉을 갈까? 양양에 살면서, 강릉이 동네 옆 도시인 입장에서, 그게 도무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지난번 속초로 가출한 이야기에 이어 이번엔 강릉. 우리끼리는 이걸 “바닷가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양양에 살면서 강원도 해안 도시들을 하나씩 답사해보는 거다. 속초가 1편이었다면, 강릉은 2편. 30분 거리에 살면서도 7~8년 만에 다시 와 보는 강릉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여행에서 양양 가스비 14만원의 충격을 잠깐 잊었다. 우리는 도시의 맛을 좀 봤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강릉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강문해변 — 30분 떨어진 곳인데 분위기가 완전 다르다
강문해변. 양양에서 30분이지만 분위기는 완전 다르다.
차로 30분을 달려 강문해변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느낀 건 사람의 밀도였다. 평일 낮인데도 사람이 꽤 있었다. 다들 어딘가 들떠 보였다. 양양 바다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풍경이다. 이제 특별히 흥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강릉 바다는 어딘가 달랐다. 아마 “여행 왔다”는 느낌이 사람들 표정에서 풍겨 나와서일 거다.
“여기는 좀 더 에너지틱하고 활기차네.”
어떤 바다 앞에 있느냐에 따라 마음의 모드가 완전히 바뀐다는 걸 그날 새삼 느꼈다.
강릉 시내 버스 정류장에서 재밌는 걸 봤다. 시티버스 이름이 “Sea Tea Bus”였다. 바다(Sea)와 차(Tea)와 버스(Bus). 누가 이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영리하다. 강릉이 왜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인지 한 컷으로 설명되는 느낌. 양양에는 이런 디테일이 없다. 양양은 그냥 양양이다.
생각해보면 강릉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교통이다. 서울에서 KTX로 2시간이면 도착한다. 양양은 KTX가 없다. 고성은 더 멀다. 강원도 동해안에서 외지인이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 강릉이다. 양양에 살면서 친구들이 놀러 오기 힘들다는 걸 매번 느낀다. 강릉은 그런 진입 장벽이 없다.
카페에서 만난 인생 옥수수 라떼
초당 옥수수 라떼. 강릉 카페 시그니처 메뉴.
강문해변 근처에는 바다뷰 카페가 빽빽하다. 양양에는 이 정도 밀도가 안 나온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제과제빵 명인이고 100% 수제빵”이라고 해서 골랐다. 결과적으로 음료가 빵을 이겼다.
초당 옥수수 라떼. 커피가 안 들어 있다. 옥수수 콘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녹여놓은 듯한 맛이다. 진짜 진짜 맛있다. 혹시 어릴 때 먹던 옥수수 모양 콘 아이스크림 기억나시는 분? 그걸 액체로 만들어놓은 거라고 보면 된다. 강릉 카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라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명란빵은… 솔직히 말해서 그냥 그저 그랬다. 빵 겉에 명란 마요를 뿌려서 구운 형태. 일본 편의점 명란빵 정도의 맛이었다. 기대치를 너무 높였던 게 문제였을 수도 있다. 음료가 성공해서 다행이지, 빵만 먹었으면 살짝 아쉬울 뻔했다.
“집에서 보는 바다뷰랑 나와서 보는 바다뷰랑은 또 달라.”
이게 그날 카페에서 가장 깊이 와 닿은 말이었다. 우리는 365일 바다뷰 집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도 카페에 와서 바다를 보면, 그 바다가 또 다르다. 같은 바다인데 마음의 모드가 다르니까. 휴대폰을 잠깐 내려놓았다. 옥수수 라떼를 두 손으로 감싸고 바다를 바라봤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강릉 카페에 오는구나” 싶었다.
참고로 카페 앞 주차장은 1시간 무료다. 그 시간 안에 자리 떠야 한다. 평일은 한적하지만 주말엔 만석. 카페 사장님의 귀띔이었다.
양양엔 없는 유니클로, 그래서 가방을 샀다
카페에서 나와서 우리가 향한 곳은 유니클로였다. 솔직히 좀 부끄럽다. 양양으로 이주하면서 가장 그리웠던 게 유니클로다. 양양에는 유니클로의 ‘유’자도 없다. 자라도 H&M도 없다. 옷이 필요하면 온라인 주문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직접 입어볼 수 없으니 매번 사이즈가 어긋난다.
이번에는 덕이가 카메라 가방으로 쓸 크로스백을 사고 싶다고 했다. 들어가자마자 매장 크기에 깜짝 놀랐다. 수도권 매장만큼 큰 사이즈였다. 양양에서는 상상도 못 할 풍경이다.
크로스백 19,000원짜리를 하나 샀다. 너무 뿌듯해서 잠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주차비 1,500원이 청구되는 순간 좀 억울해졌다.
“19,000원짜리 가방 사고 1,500원 내면 좀 억울한데?”
30분당 1,500원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양양에서는 주차비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없다. 어딜 가든 대부분 무료다. 그러다 강릉 한 번 오면 30분에 1,500원이 평범하다. (알고보니 유니클로에 주차 이야기를 하면 지원해준다)
강릉 관광 호텔 — 별 두 개 이상의 친절함
강릉 관광 호텔 객실. 시내 야경 전망.
호텔은 강릉 중앙시장 도보 거리에 있는 강릉 관광 호텔로 정했다. 별 두 개짜리 호텔이지만, 우리한테 중요한 건 등급이 아니라 위치였다. 시장이 5분 거리. 식당과 영화관이 다 도보권. 그게 곧 별 다섯 개나 마찬가지였다.
호텔 입구에 도착했는데 우리 차가 못 들어갔다. 지붕 높이 제한 때문이었다. 직원분이 외부 주차장으로 안내해주셨는데, 그 안내하는 자세가 너무 조심스러웠다.
사람들이 “왜 다른데 주차해요?” 라고 많이 했나 봐.
분명히 이 호텔은 외부 주차로 안내하면서 손님들한테 한 소리 들은 적이 있었던 거다. 그래서 직원분은 미리 미안한 표정을 짓고 계셨나 보다. 우리는 도보 1~2분이면 충분했다. 짐이라곤 작은 가방 하나뿐이라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 미안해하는 마음이 오히려 미안했다. 별 두 개짜리 호텔의 진짜 가치는 별점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그날 알았다.
객실은 의외로 넓었다. 침대 공간과 입구가 분리돼 있었다. 화장실은 일본 비즈니스 호텔처럼 작았다. 1박이라 화장실 작은 건 전혀 문제가 안 됐다. 무엇보다 창밖으로 강릉 시내 야경이 보였다. 양양에서 매일 보는 바다 야경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 건물 불빛이 반짝거리는 도시의 야경, 우리가 그리워했던 그 풍경이었다.
강릉 중앙시장
누룽지 오징어순대 17,000원. 계좌이체 시 명태회 서비스.
호텔에 짐을 풀고 바로 강릉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평일 오후인데도 사람이 빽빽했다. 호떡집 앞에 줄이 있었다. 컵 닭강정 앞에도 줄이 있었다. 염통 굽는 연기가 시장 전체에 퍼져 있었다.
원래 우리 둘은 시장에서 흥분하는 스타일이라 미리 약속했다. “한 바퀴 돌고 결정하자.” 처음 보이는 거 다 사 먹다 보면 결국 진짜 맛있는 걸 놓친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한 바퀴 돌고 우리가 결정한 첫 번째 가게는 누룽지 오징어순대 집이었다. 사장님이 너무 친절했다. 기다리는 동안 사장님이 동그랑땡 하나를 시식으로 주셨다.
그 동그랑땡, 진짜 맛있었다.
“방금한 건 짱이지.”
사장님이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사장님 단골 후보가 됐다. 알고 보니 이 가게는 원래 시장 안쪽에 있다가 지금 자리로 이전한 가게였다. 시장 시절부터 검증된 맛인 거다. 점심 시간에 현지인으로 가득 찬다는 게 다 이유가 있었다.
오징어순대를 먹으면서 사장님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다.
“오징어순대는 다 같은 데서 만들어 와요. 굽는 능력에 따라 맛이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시장에 늘어선 여러 오징어순대 집은 다 똑같은 재료를 받아서 굽는다는 거다. 그 말을 듣고 우리가 들어간 집의 오징어순대를 한 입 먹어보니 정말 그랬다. 재료는 같아도 굽는 사람의 손맛이 결국 차이를 만든다. 시장 사장님께서 우리한테 인생 진리 하나를 주셨다.
옆에서 컵 닭강정도 5,000원에 사 먹었다. 인절미 호떡도 2,500원에 도전해봤다. 컵 닭강정은 평타 정도. 인절미 호떡은 솔직히 인절미와 호떡이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다음에는 그냥 씨앗호떡을 먹기로 했다.
시장의 진짜 단점도 발견했다. 앉아서 먹을 곳이 없다. 추운 1월 시장 한복판에서 호떡을 손으로 잡고 먹었다. 손이 너무 차가웠다. 다행히 시장 옆에 월화거리라는 곳이 있어서 거기로 옮겼다. 사람들이 거기서 시장에서 산 음식을 펼쳐놓고 먹고 있었다. 시장에서 사고, 월화거리에서 먹기. 이 동선이 정답이다.
곽가네 시오야끼 — 호텔 도보 2분의 행복
곽가네 시오야끼의 대패 삼겹살 + 파절이 + 된장찌개. 40,500원.
저녁은 호텔 도보 2분 거리에 있는 곽가네 시오야끼로 정해뒀다. 챗GPT가 추천해 준 가게다. “강릉에서 먹어야 할 것”으로 검색해서 나온 곳들 중 위치가 가장 좋아서 골랐다.
이름이 시오야끼라서 처음엔 일본식 소금구이 가게인 줄 알았다. 일본어로 시오(塩)는 소금, 야끼(焼き)는 구이니까 직역하면 소금구이가 맞다. 그런데 가서 메뉴판을 보고 빵 터졌다. 대패 삼겹살에 양념 파절이를 잔뜩 올려서 구워 먹는 집 이었다. 이름은 시오야끼인데 정체는 한국식 냉삼이라니. 강릉 사장님들의 작명 센스도 보통이 아니다.
“냉삼을 먹을 때 파채를 비벼 먹을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잖아.”
집에서 먹을 때는 항상 따로따로다. 삼겹살 따로, 파절이 따로, 쌈에 싸서 먹는다. 그런데 여기는 이미 섞여 있는 맛 이었다. 따뜻한 고기와 차가운 양념이 한 입에 들어오는데, 이게 생각보다 너무 잘 맞았다.
된장찌개를 한 술 떠서 입에 넣었을 때, 정말 그 순간이었다.
“이래서 강릉 여행 오는구나.”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바다도 보고, 시장도 보고, 도시 산책도 하고, 호텔에서 야경도 보고, 마지막에 도보 2분 거리에서 대패 삼겹살에 맥주까지. 하루가 이렇게 패키지로 완성되는 도시는 흔치 않다. 양양에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고, 속초에서도 이 정도 압축은 어렵다. 강릉의 진짜 매력은 모든 게 도보권에 모여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번 자리 잡으면 차에 다시 탈 일이 없다는 거였다.
-7도 강풍 속에 줄 서있는 사람들 — 길감자라는 미스터리
7도 강풍에도 길감자 줄. 결국 못 사 먹음.
곽가네에서 나와 우리는 길감자 를 사러 갔다. 감자 반죽으로 만든 강릉 시즌 인기 스낵이라고 했다. 바다가 감자를 워낙 좋아해서 한참 전부터 노래를 불렀던 그 길감자.
오후 7시, 체감온도 -7도, 강풍주의보. 그날 강릉의 날씨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길감자집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 둘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 추위에, 이 바람에, 이 시간에, 사람들이 그 길감자 하나를 사려고 줄을 서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아니야 나는 안 먹을래.”
추위에 약한 바다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우리 옆을 지나가던 행인 한 분이 갑자기 한마디 하셨다.
“두 박스 사야지 맛있더라구. 하나론 모자르던데.”
그 말이 더 충격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두 박스가 기본이라고? 저 줄을 서서 두 박스를 사 가는 사람들이라니. 우리는 길감자를 미련 없이 포기하고 산책 모드로 전환했다. 다음날 점심에 다시 가봤지만 그때는 어제보다 줄이 더 길었다. 결국 우리는 강릉 1박 2일 동안 길감자를 한 입도 못 먹고 돌아왔다.
“유행이 지난 다음에 먹도록 할게요.”
체념이 아니라 전략이다. 다음에 강릉 올 때, 유행이 한풀 꺾인 후에, 평일 오전 9시에 도전하기로 했다. 강릉에 살지 않는 한 길감자는 우리에게 영원한 미션이 될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 — 금학 칼국수의 인생 장칼국수
금학 칼국수의 장칼국수 8,000원. 현지인 손맛.
다음날 아침은 금학 칼국수 였다. 강릉 가면 무조건 장칼국수라는 게 인터넷의 정설이라, 챗GPT에게 “현지인이 가는 장칼국수 집”을 물어봤다. 챗GPT가 추천한 곳이 금학 칼국수였다. (참고로 챗GPT는 이날 오후에 우리에게 큰 망신을 당한다.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가게 안에 들어선 순간 우리 둘 다 동시에 웃었다.
“우리 할머니네 온 것 같아. 감성 장난 아닌데?”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는 작은 식당이었다. 신발을 벗고 좌식 자리에 앉아야 했고, 옆 테이블에는 진짜 시골 할머니 한 분 이 혼자 식사를 하고 계셨다. 챗GPT가 “현지인이 가는 곳”이라고 했는데, 정말 현지인이 식사 중인 그 진풍경. 평일 오전이라 줄도 없었다.
장칼국수는 8,000원이었다. 빨간 국물이 김치와 함께 나왔는데, 한 술 떠서 입에 넣은 순간 이 가격이 너무 양심적이라는 걸 알았다.
“고추장 본연의 맛이 딱 있다.”
매운데 짜지 않다. 고추장의 발효된 깊이가 그대로 살아있다. 면이 적당히 굵고, 국물이 면을 끌어안는다. 신김치를 한 입 베어 물고 다시 칼국수 한 입. 추운 1월 아침에 먹는 장칼국수는 해장 그 자체 였다.
“1년 전에 먹은 술까지 해장되는 느낌.”
바다가 한 말이 정확했다. 바다는 원래 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날 아침은 눈 뜨자마자 “장칼국수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날의 날씨와 그날의 장칼국수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바다는 결국 강릉에서 먹은 음식 중 장칼국수를 1위로 꼽았다. (덕이는 어제 호텔에서 먹은 배니 닭강정 1위 의견을 끝까지 고수했다.)
“기술적인 맛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딱 진짜 손맛 가득 담긴 칼국수였다.”
이런 가게가 강릉 한복판에 살아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관광객이 몰려 들어오는 도시인데,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그냥 본인 페이스로 손맛을 지키고 있는 가게 . 양양에 살면 이런 가게를 발견하기 어렵다. 강릉이라서 가능한 풍경이었다.
오죽헌 — 그리고 챗GPT가 거짓말한 사건
600년 된 배롱나무. 100일 동안 피는 백일홍의 어원.
장칼국수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길감자를 다시 한 번 도전했다가 또 실패한 후, 우리는 오죽헌으로 향했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다. 5만원권의 신사임당과 5천원권의 율곡 이이, 한국 화폐 최강 가족의 본거지.
사실 바다는 강릉에 자주 왔으면서도 한 번도 오죽헌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가는 곳이라 별 관심이 없었고, 커서는 너무 익숙해서 굳이 안 갔던 거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공부해보자 싶어서 챗GPT에 물어봤다.
그리고 차 안에서 챗GPT한테 들은 정보를 신나게 떠들었다.
“허난설헌이 신사임당의 딸이래. 율곡 이이의 누나야. 동생은 허균이고. 한 가족인데 시집을 가서 다른 곳에 살았던 거래.”
이 정보가 너무 흥미로워서 한참 동안 가족사 분석을 했다. 신사임당이 얼마나 대단한 어머니인지, 허난설헌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비운의 천재인지, 허균이 홍길동을 쓰면서 누나를 생각했을지 어쩌고저쩌고. 오죽헌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 차 안은 조선시대 가족 다큐멘터리 현장이었다.
그런데 입장료 3,000원을 내고 오죽헌에 들어가서 안내문을 읽다가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허난설헌과 허균은 보이지 않았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만 있었다. 다시 챗GPT에 물어봤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보를 잘못 말씀드렸습니다.”
진짜로 그렇게 사과를 했다. 허균과 허난설헌은 남매가 맞고 강릉 출신도 맞는데, 신사임당·율곡 이이와는 완전히 다른 가족 이었다. 그냥 같은 강릉 출신이라 묶여서 이야기되는 거지, 혈연관계가 전혀 없었다.
“여러분 챗 GPT를 너무 맹신하지 마세요.”
우리가 차에서 너무 신나게 떠든 거짓 정보가 너무 부끄러웠다. 이걸 영상으로 찍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로 떠들 뻔했다. 챗GPT가 자신감 있게 거짓말하는 거, 한 번 당해본 사람만 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도 중요한 사실은 다 네이버에서 한 번 더 검증한다.
오죽헌은 한 시간 정도 둘러보면 좋다. 그중 인상 깊었던 두 가지를 꼽자면, 첫 번째는 600년 된 배롱나무 였다. 백일홍이 100일 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꽃나무. 어제 우리가 호텔에서 마신 강릉 수제맥주 이름이 “백일홍”이었던 게 갑자기 이해가 됐다. 도시의 모든 게 연결되어 있는 거다.
두 번째는 화폐 전시관 이었다. 솔직히 오죽헌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이 여기였다. 일제강점기 돈, 광복 직후 돈, 1962년 50원짜리, 옛날 500환짜리, 부모님 세대가 봤을 돈, 우리 세대가 봤던 돈, 그리고 5만원권. 부모님께 사진을 보내드렸다. 위인 동상 앞에서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옛날 돈 앞에서는 진심이 났다.
“역시 돈인가.”
이 가족은 아무래도 신사임당의 인성 보다는 5만원권의 위력 에 더 끌리나 보다.
마지막 코스 — 인생 1위가 된 초당 소금빵
초당 소금빵 4개 14,000원. 강릉 음식 1위 등극.
강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초당 소금빵 집이었다. 강릉은 초당이라는 동네 이름이 붙는 음식이 많다. 초당 두부, 초당 옥수수, 초당 소금빵. 그날 우리는 이미 옥수수 라떼와 두부 모양 빵을 먹은 상태였고, 마지막은 소금빵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가게 입구에서 잠깐 헷갈렸다. 메뉴판 비슷한 데 “Free!”라고 적혀 있어서 내가 흥분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냥 손글씨였다. 무료가 아니었다. 살짝 부끄러웠다.
이 집은 4개 1세트로만 판다. 14,000원이다. 처음엔 좀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사 먹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텐데 무조건 4개라니. 그런데 한 입 먹어보고 그 가격 정책을 이해했다.
“한 두개 사서 가다가 분명히 후회하시니까. 그냥 4개로 세트로 파는 거야.”
사장님이 손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는 거다. 한두 개로는 절대 모자란다. 4개를 사도 부족할지도 모른다.
소금빵을 산 직후, 가게 앞에서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겉은 바삭한데 안은 부드러웠다. 특히 빵 밑창이 갓 구운 그대로 바삭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 입 깨물자 안에서 버터가 진짜 흘러나왔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맛있어. 뒤에 버터가 촤르르르 지금 흐르고 있어요.”
소금이 짭조름하게 박혀 있어서 단맛 없는데도 자꾸 끌린다. 한 입 두 입 먹다 보니 이 가게가 왜 4개 묶음으로만 파는지 100% 이해됐다. 이걸 한 개 사서 갔으면 진짜로 후회했을 거다.
그날 우리가 강릉에서 먹은 음식 중 1위 토론이 다시 시작됐다. 바다는 장칼국수에서 의견을 바꿨다.
“강릉 와서 먹은 거 1위. 장칼국수 이겼어.”
그렇게 초당 소금빵은 강릉 1박 2일의 진짜 1위가 됐다. 인생 소금빵. 양양에서도, 도쿄에서도, 서울 명동에서도 먹어봤지만 이 집을 이긴 건 없었다. 두 개를 길에서 까먹고, 두 개는 집까지 들고 와서 다음날 커피랑 먹었다. 다음날 먹은 것도 여전히 맛있었다. 갓 구워서 먹는 게 1순위지만, 식어도 충분히 맛있는 빵이라는 게 진짜 빵의 실력이다.
강릉 1박 2일, 우리가 쓴 돈
집에서 호텔까지 왕복 60km를 자차로 다녀왔으니 기름값으로 약 25,000원. 강문해변 카페에서 18,000원, 유니클로에서 가방 19,000원과 주차비 1,500원. 호텔 1박이 80,000원이었고, 외부 주차는 무료였다. 강릉 중앙시장에서 누룽지 오징어순대·컵 닭강정·인절미 호떡 합쳐 24,500원, 곽가네 시오야끼 저녁이 40,500원, 호텔에서 먹은 배니 닭강정과 강릉 맥주가 20,000원. 다음날 금학 칼국수 16,000원, 오죽헌 입장료 6,000원, 마지막 초당 소금빵 14,000원.
다 합치면 약 264,500원. 2인 1박 2일 강원도 여행으로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호텔만 등급 올리면 50만원 넘게도 가능하지만, 우리한테는 별 두 개짜리 호텔이 진짜 정답이었다. 시내 도보권의 가치가 별 다섯 개보다 컸다.
결론: 강릉이 사랑받는 이유, 양양 살면서 알게 됐다
여행 도착 전 우리가 가진 의문은 “왜들 그렇게 강릉을 가는걸까?”였다. 1박 2일을 보내고 떠날 때, 답이 명확해졌다.
강릉은 바다와 도시가 완벽하게 섞여 있는 곳이었다. 바다도 보고 싶고, 카페도 가고 싶다. 시장도 둘러보고, 맛있는 저녁도 먹고 싶다. 도시 야경도 보고, 호텔에서 야식도 먹고 싶을 때. 강릉은 그 모든 걸 도보권에서 해결해준다. 양양에서는 자연이 9, 도시가 1이라면, 강릉은 자연이 5, 도시가 5의 균형이다.
우리는 양양에 사는 게 좋다. 조용하고, 바다가 매일 다르고, 가스비 14만원이 좀 충격이지만 그래도 좋다. 그런데 가끔 도시가 그리울 때, 양양 사람에게 강릉은 30분 거리의 도시 충전소 같은 곳이다. 평소엔 양양에서 살고, 가끔 강릉에서 1박 2일 가출하는 이 균형이 우리에겐 완벽했다.
세계여행을 4년째 하면서 우리는 늘 한 도시에서 길게 머물렀다. 한 달, 두 달, 가끔은 세 달. 그래서 1박 2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이 솔직히 어색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빠른 여행의 맛 도 나쁘지 않았다. 짧으니까 시간을 허투루 안 쓰게 되고, 매 순간이 더 또렷해졌다.
“되게 오랜만에 바쁜 여행을 한 기분이야. 요즘 사람들의 여행을 한 기분.”
장기여행을 하던 부부가 1박 2일 한국식 여행을 해보니, 이게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요즘 사람들이 왜 강원도 1박 2일을 자주 가는지 그 이유도 살짝 이해됐다.
다음 행선지는 고성이다. 바닷가 프로젝트 3편으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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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해변의 평일 분위기, 강릉 중앙시장 사장님의 동그랑땡 시식 인심, 곽가네 시오야끼의 대패 삼겹살과 양념 파절이 조합, -7도 강풍 속 길감자 줄을 보고 충격받은 우리 표정 , 금학 칼국수 할머니 손님과 함께한 평일 오전, 600년 배롱나무, 마지막에 한 입 먹고 말없어진 초당 소금빵까지 — 글로는 다 담을 수 없는 1박 2일의 진짜 분위기가 영상에 있어요.
양양 귀촌부부의 강릉 1박 2일 리얼 브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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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바다덕(BADADUCK) 유튜브 채널의 국내여행 시리즈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