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차가 쫓아왔어요”
그날 아침은 평범하게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진 텍사스 고속도로.
오전 11시. 텍사스의 황량한 고속도로였다. 백미러로 빨간 불빛이 깜빡거렸다. 우리 부부는 1달러짜리 캠핑카를 타고 미국을 횡단하던 중이었다. 그날이 9일째 되는 날이었다.
미국에서 경찰에게 차를 세우라는 신호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출발 전에 한 번은 공부해뒀다. 두 손을 핸들 위에 올리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갑자기 움직이면 위험하다고 했다. 미국에서 총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게 바로 이런 차량 단속 상황 이라고도 들었다. 그런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글은 지난번 1달러 캠핑카로 미국을 횡단했던 여행 의 9일째 기록이다. 텍사스에서 경찰에게 잡힌 날, 그리고 9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발모라이 주립공원의 천연 수영장. 다음 날에는 엘파소의 국민 타코집과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까지 다녀온 하루였다. 33피트짜리 초대형 캠핑카 하나로 두 개의 주를 넘은, 우리 부부의 가장 길었던 9일째다.
갓길에 차를 세웠다, 두 손을 핸들 위에
그날 아침은 평범하게 시작했다. 텍사스의 작은 마을 록하트에서 출발했다. 전날 텍사스 바베큐를 잔뜩 먹고 모텔에서 푹 잤다. 덕이는 새벽부터 운전대를 잡았고, 우리는 LA를 향해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황량한 고속도로가 끝없이 이어졌다. 차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백미러에 빨간 불빛이 보였다. 짝꿍이 먼저 발견했다.
“경찰차가 쫓아왔어요.”
“왜지?”
덕이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출발 전에 공부한 대로 두 손을 핸들 위에 올렸다.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손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어우 나 갑자기 손 떨려.”
경찰관이 다가왔다. 우리는 최대한 밝고 상냥하게 인사했다. 그가 운전면허증과 보험증서를 요구했다. 덕이는 뒤늦게 알아듣고 서류를 건넸다. 그러더니 운전자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차에서 내려서 경찰관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짝꿍을 카메라로 지켜봤다. 영어가 평소보다 더 안 들렸다. 너무 당황한 것 같았다. 짝꿍이 차로 돌아왔을 때 표정이 굳어 있었다.
결과는 경고장, 그런데 입력은 된다고요?
결과는 경고장. 그래도 입력은 된다고 했다. “Just warning이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이거 뭐 해야 돼? 돈… 벌금?”
“아니야 경고만 한대.”
다행히 벌금은 아니었다. 우리가 어긴 건 텍사스의 특별한 운전 규칙이었다. 길에 사람이 있거나 천천히 가라는 표시가 있으면, 차선을 한 칸 옮기거나 규정속도보다 20마일 천천히 가야 한다는 거였다. 우리는 그걸 몰랐다. 그래서 너무 빨리 갔다고 잡힌 거였다.
“근데 여행자니까 지금은 경고로 끊는대요. 근데 대신 입력은 한다고 했어요.”
경찰관은 우리에게 친절했다. 어디서 왔는지, 여행은 어땠는지 물었다. 짝꿍은 마이애미에서 출발해서 LA로 가는 중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부부 유튜버라고 했다. 경찰관은 미국 여행 잘하라고 인사하고 돌아갔다. 마지막에 종이 한 장을 줬다. 경고장이었다.
“Just warning이라고 했으니까 경고를 했다는 것도 증거로 남기네.”
차에 다시 올라타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랐잖아.”
“나도 너무 놀랐어.”
뭐 때문에 잡혔는지 우리끼리 추측해 봤다. 노래를 너무 크게 틀어서 그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들었던 건 잔잔한 노래였다. 결국 정답은 단순했다. 그냥 우리가 텍사스 운전 규칙을 몰랐던 거다.
여행자에게는 모든 게 학습이다. 미국에서 운전하실 분들은 꼭 알아두시면 좋겠다. 길에 사람이 있거나 차가 멈춰 있으면 차선을 옮기거나 속도를 줄여야 한다. 텍사스뿐만 아니라 미국 대부분의 주에 비슷한 법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미국 서부 캠핑카로 20일을 다닌 첫 여행 때도 이런 규칙은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다. 9일째가 되어서야 알게 된 거다.
다행히 한국 면허로 미국에서 운전이 가능한 시스템이 있었다. 만약 진짜 벌금이 나왔다면 처리하는 데 또 시간이 걸렸을 거다. 경고장으로 끝난 게 정말 다행이었다.
9시간 30분 운전, 발모라이 주립공원에 도착했다
9시간 30분 운전, 405마일 끝에 도착한 발모라이 주립공원.
그날 덕이는 새벽 8시 30분부터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오후 5시에 발모라이 주립공원에 도착했다. 9시간 30분 동안 405마일을 달렸다. 한국 단위로 약 650km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길었다.
발모라이는 텍사스의 어딘가에 있는 작은 주립공원이었다. 이름도 처음 들어봤다. 그날 아침에 즉흥적으로 결정한 곳이었다. 이 안에 1년 내내 22도에서 24도를 유지하는 천연 수영장이 있다고 했다. 그게 우리를 끌어당겼다.
“내일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날 그날 정해요.”
캠핑장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았다. 옆자리에 캠핑카를 끌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자전거까지 차에 싣고 다녔다.
“이게 부자들의 취미가 맞다니까.”
기름값만 봐도 그렇다. 우리도 하루에 100달러 가까이 기름을 넣고 있었다. 그래도 그날만큼은 그 모든 게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텍사스 시골의 이름 모를 주립공원 한복판에서, 우리만 아는 천연 수영장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1년 내내 22도, 텍사스 시골의 천연 수영장
1년 내내 22~24도를 유지하는 천연 수영장. “와 미쳤다.”
수영장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크고 멋졌다. 물이 너무 맑아서 바닥이 다 보였다. 작은 물고기까지 헤엄치고 있었다.
“물 맑은 것 보세요. 자연이 이런 겁니다.”
지하 샘에서 솟아나는 물로 채워진 천연 수영장이었다. 1년 내내 22~24도를 유지한다고 했다. 그날 기온이 30도가 넘었으니, 물이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발끝부터 천천히 들어갔다. 처음엔 너무 차가워서 비명이 나왔다. 그런데 한 번에 들어가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풍덩 뛰어들었다.
“와 미쳤다.”
수영장 한가운데로 가니 발이 닿지 않았다. 깊었다. 다이빙대도 있었다. 짝꿍은 다이빙대에 올라가서 한 번 뛰어내렸다. 멋있게 하려고 했지만 별로 멋있지 않았다.
다이빙대에서 한 번 더 도전. 별반 다르진 않았지만 행복했다.
“어때? 멋 없었어?”
“아니 멋있었어.”
“거짓말.”
거짓말이 들켰지만 한 번 더 뛰었다. 별반 다르진 않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텍사스 시골의 이름 모를 주립공원에서 우리 둘만의 천연 수영장을 즐긴 오후였다.
다음 날 엘파소, 멕시코 국경의 도시
텍사스 서쪽 끝, 멕시코 국경에 맞닿은 도시 엘파소.
다음 날 아침 6시. 일어났는데 짝꿍이 옆에 없어서 잠깐 놀랐다. 짝꿍은 이미 일어나서 조용히 있었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지금 여기는 엘파소라는 도시입니다. 텍사스의 서쪽 끝이고, 멕시코랑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경 도시예요.”
엘파소를 일부러 들르고 싶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을 직접 보고 싶었다. 둘째, 엘파소의 국민 맛집이라고 불리는 치코스 타코 를 먹어보고 싶었다.
미국에서 캠핑카 여행을 하면서 타코를 사 먹기가 어려웠다. 물가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지난번 멕시코에서 다녀온 똘랑똥고 1일 투어 때 먹은 타코가 1,000원도 안 했는데, 미국에서는 같은 타코가 5달러 가까이 했다. 그런데 엘파소의 치코스 타코는 가격이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신박한 형태의 타코였다.
“이게 타코야.”
또띠아에 고기를 넣어서 말아 튀긴 다음, 토마토 소스에 담가서 먹는 형태였다. 일반적인 타코와는 완전히 달랐다. 멕시코에서 먹던 그 타코가 아니었다.
엘파소 국민 맛집 치코스 타코, 도리토스의 상위 호환
엘파소 국민 타코집 치코스 타코. “도리토스의 상위 호환.” 그린 칠리를 올리면 한국인 입맛에 딱이다.
치코스 타코 매장은 캐주얼한 분위기였다. 큰 캠핑카를 끌고 가서 통행에 방해가 될까 봐 가게 끝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돈 잘 가져왔지?”
“캐쉬온니.”
현금만 받는 가게였다. 다행히 미리 챙겨둔 현금이 있었다. 더블 두 개와 감자튀김,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했다. 다이어트 콜라는 2.62달러였다. 매장에서 먹기로 했다.
타코가 나왔는데 우리가 알던 그 모양이 아니었다. 옥수수 또띠아를 둥글게 말아서 튀긴 다음, 위에 토마토 소스와 치즈를 올린 형태였다. 우리나라 과자 전병 같았다.
“딱딱해요. 타코가.”
“튀김이라서 여기 끝에다 걸어.”
손가락 끝에 타코를 끼워서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맛있어요. 전통적인 타코맛은 아닌 것 같고. 특색이 있다.”
가게에 그린 칠리 소스가 있었다. 그걸 타코 위에 올려서 먹었더니 맛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린 칠리 맛있다. 오랜만에 맛있는 칠리 먹는다.”
“한국 사람한테는 딱이야? 그린 칠리를 먹어야지.”
먹을수록 매력이 있었다. 첫 입은 딱딱하고 낯설었는데, 두 입 세 입 먹으니 손이 저절로 갔다. 멕시코 본토 느낌도 났다. 국경이 가까운 도시라 그런지, 같은 타코지만 다른 결의 맛이었다. 안에 다진 고기가 들어 있는 것도 일반 타코와 달랐다. 토마토 소스에 살짝 적셔진 또띠아의 식감이 묘하게 중독성 있었다.
“이거 먹고 장벽 보려고 딱 두 가지예요. 엘파소로 지나가려고 한 이유가.”
생각날 맛이었다. 다시 엘파소를 지나간다면 또 들를 것 같은 가게였다.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그게 1,000km나 된다고?
3,100km 국경 중 1,000km에 설치된 검은 철벽. 서울~부산 거리의 두 배 반.
타코를 먹고 나서 국경 장벽을 보러 갔다. 우리 캠핑카가 너무 커서 주차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장벽 옆 고속도로를 따라 차로 지나가면서 보기로 했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약 3,100km다. 그중 장벽이 쳐진 구간은 약 1,000km라고 한다. 나머지는 자연 국경이거나 드론과 센서로 감시한다고 했다. 1,000km는 어느 정도일까 계산해 봤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약 400km니까, 그 두 배 반 정도였다.
“땅따먹기 한 것처럼 반이 딱 갈려 있는 느낌이에요.”
검은 철벽이 끝없이 이어졌다. 가까이 가서 보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강했다. 우리나라는 국경으로 넘어갈 수 있는 나라가 없다. 그래서 이런 풍경이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한쪽은 미국, 한쪽은 멕시코. 그 사이를 가르는 한 줄의 검은 선이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깨닫는다. 한 나라와 다른 나라가 어떻게 만나고 갈라지는지, 그 경계에 무엇이 있는지. 책에서 읽는 것과 직접 보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사진으로는 그저 검은 선이지만, 실제로 보면 그 너머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떠오른다.
10시간 운전, 결국 RV파크에 도착했다
10시간 운전 끝, 애리조나 RV파크에 도착
장벽을 지나서 다시 서쪽으로 달렸다. 그날 RV파크 예약을 미리 해두었는데, 거리 계산을 잘못했다. 원래 가야 할 방향에서 30분이나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 곳이었다.
“아 진짜 너무 고생했다.”
결국 그날 우리는 10시간을 운전했다. 800km, 약 470마일이었다. 텍사스에서 뉴멕시코주를 지나 애리조나주까지 들어왔다. 두 개의 주를 넘었다. 시차도 한 시간 생겼다.
“처음으로 밤에 운전해서 도착했습니다.”
RV파크에 도착해서 빠르게 캠핑카를 세팅했다. 짝꿍은 볶음밥과 만두를 차렸다. 와인 한 병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다. 조용한 캠핑카 안에서 둘만의 소소한 파티가 시작됐다.
1달러 캠핑카,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지난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다시 정리한다. 우리가 타고 있는 1달러 캠핑카는 리로케이션 딜(Relocation Deal)이라는 시스템이다. 캠핑카 회사가 한쪽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차량을 이동시켜야 할 때, 그 일을 여행자에게 맡기는 거다. 우리는 마이애미에서 LA까지 15일 동안 차량을 이동시키는 조건으로 하루 1달러에 33피트짜리 초대형 캠핑카 를 타고 있다.
마침 우리가 마이애미에 갈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서부로도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일정이 딱 맞았다. 미국 횡단을 1달러 캠핑카로 한다는 게 비현실적이지만, 시스템을 알면 누구나 가능하다.
자세한 예약 방법과 우리가 처음 캠핑카를 받은 마이애미 이야기는 지난 1달러 캠핑카 1편 글 에 정리해 두었다. 한 번에 다 읽어보면 흐름이 잡힐 거다.
텍사스에서 애리조나로, 진짜 미국 서부에 들어왔다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시면서 짝꿍과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경찰에게 잡힌 일부터 천연 수영장, 그리고 치코스 타코까지. 정신없이 길었던 하루였다.
여행을 길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기게 된다. 그게 좋은 점일 수도 있고, 나쁜 점일 수도 있다. 그날 짝꿍은 처음으로 그 부분을 짚어줬다. 너무 관대해지면 정작 챙겨야 할 것을 놓치게 된다고.
“너 좀 늙었어. 너 여기 눈 밑에 늙었어.”
“일주일 동안 해 받으면서 운전해서 그래.”
10시간 운전한 사람의 얼굴은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짝꿍은 다음 날도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그래도 표정은 밝았다.
“이게 서부지. 이거 때문에 우리가 캠핑카 여행했었지.”
텍사스에서 뉴멕시코, 그리고 애리조나로 넘어오면서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영화에서 보던 미국 서부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일몰이 예뻤다. 9일째 되는 날, 우리는 진짜 서부에 들어왔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보냈다.”
내일은 여기서 하루 더 쉬기로 했다. 9시간 30분 운전한 다음 날에 또 운전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1달러 캠핑카 여행 9일째가 끝났다.
다음 편에서는 애리조나에서 캘리포니아로 넘어가는 이야기를 풀어볼 예정이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마지막 며칠과, 드디어 LA에 도착해 캠핑카를 반납하는 그 순간까지. 1달러 캠핑카 시리즈의 진짜 마지막이다.
📺 영상으로 보면 더 생생합니다
텍사스 고속도로에서 경찰에게 잡힌 그 떨리는 순간, 9시간 30분 운전 끝에 도착한 발모라이 주립공원의 청록색 천연 수영장, 엘파소 국민 맛집 치코스 타코의 옥수수 또띠아, 미국-멕시코 국경 검은 철벽이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 그리고 텍사스에서 뉴멕시코를 지나 애리조나까지 두 개의 주를 넘는 9일째 하루까지 — 글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분위기가 영상에 있어요.
세계여행 4년 차 부부의 1달러 캠핑카 미국 횡단 9일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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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바다덕(BADADUCK) 유튜브 채널의 세계여행 시리즈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